자유게시판

밀양에 계시는 이계삼 선생님의 글입니다.

노원정 0 1,079 2014.05.29 13:10

‘밀양’하면 사람들은 영화 <밀양>을 먼저 떠올린다. 거기서 밀양은 ‘비밀스러운 빛(secret sunshine)’이라는 한자어 풀이를 깔고 있는, 극단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죽지 못해 사는 한 여인의 ‘구원’이 싹트는 종교성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이 밀양에 그런 이름을 부여한 것은 일종의 지적 넌센스라 할 수 있다. 밀양은 오래도록 ‘미리벌’로 불리었고, 변진 24국의 하나인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도시국가였다.

‘미리’의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논이 분분하지만 6세기 지증왕 대에 미리미동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되었을 때 불리운 이름이 ‘불기운을 밀어낸다’는 뜻을 가진 ‘추화’(推火)군이었던 점이나, 다시 8세기 경덕왕 시절 ‘밀성군’으로 개칭될 때에도 한자어 밀(密)자의 소리를 빌어온 점을 고려하면, ‘밀어낸다’는 뜻이 가장 근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소리를 빌어온 ‘밀(密)’자에 덧붙은 ‘비밀스럽다’는 뜻과 강을 끼고 있는 양지바른 평원 지역의 지명에 붙였던 ‘양(陽)’자에서 ‘볕’의 의미를 추출하여 거기서 구원의 종교성을 입힌 것은 실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카센터 사장으로 분한 배우 송강호는 ‘밀양이 어떤 곳이냐’는 거듭된 질문에 ‘다른 데랑 똑같다’고 답한다. 영화 ‘밀양’은 구체적인 장소성을 거세한, 구원과 종교성을 담지한 공간의 일반명사인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대학과 군대, 교직 초년을 합한 10년을 제외한 나머지 30여년의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 밀양이란 ‘다른 데와 똑같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1973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함평이씨 장양공파에 속한 내 6대조 조부님들은 서울에서 한미한 양반으로 지내다 밀양으로 이주하여 남인 계열의 여주 이씨 집안의 소작을 살았다. 수십년 고생스럽게 살며 자작농의 경계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왜정’이라고 부르던 일제 강점 초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 때 다시 땅을 빼앗기고 내 증조부님, 조부님대 어른들은 일본 오사카 인근 와카야마현(和歌山縣)으로 건너가 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다. 거기서 아버지 형제들이 태어났다. 일제 강점 말기,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 공습이 극심해질 무렵, 조부님은 밀양으로 되돌아올 생각을 하고, 가산을 정리한 뒤 조모님과 아버지 형제들을 먼저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맨 마지막으로 나오시던 길, 조부님이 타고 계시던 관부연락선이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하여 조부님은 끝내 수중고혼이 되셨다.

아버지의 생은 이때부터 결정적으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조선말이 서툰 아버지는 학업은 고사하고, 조모님을 도와 주렁주렁 매달린 여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구두닦이, 날품팔이, 행상의 기약 없는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했다. 아버지는 조기 파시철에는 멀리 연평도까지 가서 풀빵장사를 했는데, 기거서 역시 평양 출신으로 피난 중에 가족들과 헤어져 전쟁고아가 되어 푸줏간집 수양딸로 자라난 어머니를 만나 밀양으로 데려왔고, 그리고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마흔이 넘어 나를 얻었다. 부모님은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변에 무허가 슬레이트 집을 짓고 강에서 민물생선을 잡아 근처 5일장에 내다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또래 아이들보다 가난했고, 밤낮없이 이어지는 부모님의 고된 노동을 지켜보면서 자랐지만,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낙동강 지류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강변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개학했을 때 새카맣게 탄 내 얼굴을 보고 동무들이 깜짝 놀라던 일이며, 첫 산수 시간에 숫자를 어떻게 쓰는지를 잊어버려 헤매던 기억이 난다. 경부선 기찻길옆 허름한 우리집은 결국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약간의 보상금을 받고 밀양 시내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말았는데, 그 시절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출신성분에 대한 컴플렉스와 입시 교육의 고통으로 자주 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었고, 이것을 잊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 아무 희망이 없던 시절, 전교조 선생님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감동이 결국 나를 교사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대학을 마치고 경기도 김포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고향으로 학교를 옮겨 그만두기까지 11년간 중등 국어교사로 일했다. 나는 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인가. 나는 사춘기 시절 오직 이 답답한 도시를 떠나기 위한 목표 하나로 살았다. 해방공간 당시 온 도시에 넘쳐 흘렀던 진취적이고 혁명적인 열기를 일거에 쓸어내고, 끔찍한 살육으로(밀양에는 보도연맹 학살지가 세 군데나 있으며, 빨치산 투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말깨나 하고 글깨나 읽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어딘가로 떠나게 했던 이 극우의 소도시, 반공주의와 속물적인 인생관만이 횡행하는 남성 가부장들의 소도시에서 나는 깊은 목마름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 밀양으로 객지생활 10년 만에 나는 되돌아온 것이다.

무엇보다, 도회적 삶이 생리에 맞지 않았다. 내 삶이, 이 시대의 생존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달리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뿌리내리는 것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은 짧았고, 나는 하나의 식물이 되어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싶었다. 도회의 유목적 삶, 겨우 정붙인 곳에서 떠밀려나야 하는 생존 방식에 나는 진저리를 쳤고, 그곳들도 극우 남성 가부장의 생존방식이 횡행하는 것에는 밀양과 하나 다르지 않았다. 모두는 모두에게 익명의 존재로, 늘 성난 얼굴을 하고서 언제든 누군가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의 공간이 바로 도시였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빌어다 쓰는 생태계의 종양이 곧 도시였다. 그런 자각이 일었을 때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밀양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학교를 옮겨 밀양으로 내려왔다.

학교를 그만 둔 직후, 또 무슨 공교로운 인연인지 밀양 송전탑 싸움에 끼여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경과지 주민이 아닌 내가 이 싸움에 3년간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일에 몰두하는 것에 더러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그 반대편에서 나는 경찰 검찰 조사만 벌써 열 번이 넘게 받았고, 특수공무집행방해, 집시법 위반, 기부금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거나 기소될 예정이다. 그동안 관계 맺어온 어르신들과의 우정과 의리, 내가 빠졌을 때 생겨날 실무 역할의 빈자리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남아 있다.

내게 던져지는 경의의 인사는 하루라도 빨리 이 싸움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송전탑이 다 들어서고 주렁주렁 걸린 송전선으로 76만5천볼트의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밀양을 상상할 때가 있다. 그 아래에서 내가 사랑하는 어르신들이 살아가야 할 황망한 일상을 상상할 때가 있다. 우리가 목놓아 부르짖었던 고리원전단지의 노후 원전 연장가동과 신규 원전 증설은 하나도 막아내지 못한 채 패배감으로 주눅든 채 여생을 보내야할 어르신들의 생애를 상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몸이 떨려온다. 결국 내가 송전탑 싸움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짐을 알고 있다. 이 싸움이 끝나더라도 나는 이곳 밀양에서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이 싸움의 뒤설거지를 해야 하며, 끝내 어르신들의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른바 ‘외부세력’들이 지금 기울어가는 이 싸움을 응원할지언정, 송전탑 싸움을 바라보는 이곳의 여론은 차갑다. 그들에게 나는 ‘목적이 의심스러운’ 별스런 한 밀양 출신 ‘운동권’이다. 나는 그런 수군거림에는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 밀양은 ‘비밀스러운 빛’을 담지한 구원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잔혹한 살육을 겪은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의 한 전형일 따름이다. 그리고, 배후의 대도시를 끼고 있는 퇴락한 농촌공동체가 끝내 당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유린을 지금 송전탑을 통해 처절하게 10년째 겪고 있는 가련한 노인들의 터전일 따름이다.

내가 이곳에서 일생을 버틴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나라는 이미 망했다. 세상은 정글 같고, 이곳 밀양은 그러나 여전히 붉고 험악한 얼굴 그대로 씩씩대며 갈짓자의 길을 간다. 밀양은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 다만, 나는 내게 부여된 한정된 책임, 한정된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 한 사람이고 싶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달리 갈 데가 없다. 그리고, 골똘하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20세기 후반기 밀양에서 태어나 21세기 전반기까지 펼쳐진 내 생애의 지평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방식임을 또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뿌리내린 이곳에서 조용히, 곱게, 그러나 치열하게 늙어가고 싶은 것이다.(월간 나들 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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